2007.09.30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창피함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이며,
삶의 가장 큰 용기는 긍정생각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직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대충 묻어 사는 무지이며,
삶의 가장 큰 용기는 거짓의 탈을 벗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울음
눈물이 나다가 이내 울음으로...
연기자가 아닌 이상 울음은 조절이 안됩니다...
울고 싶다고 울고, 울기 싫다고 안 울 수 없습니다...
울 때면 마음의 찌꺼기가 모두 씻기워 집니다...
훌쩍 커버린 지금 창피해서 맘대로 울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종종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반성의 울음이면, 모든 잘못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나갑니다...
사랑의 울음이면, 아름다운 마음의 눈물이 온몸을 적십니다...
용서의 울음이면, 감싸 안는 이해의 눈물이 따뜻하게 마음을 적십니다...
울음으로 모든 잘못을 용서 받을 수는 없지만,
울음으로 모든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지만,
울음은 내 스스로의 뉘우침이 되고, 나를 사랑함에 더 없이 좋습니다...
그 어떤 연유로든 우는 것은 즐겁고 즐겁습니다...
그 어떤 연유로든 우는 것이 행복하고 행복합니다...
울음으로써 내 마음의 잘못을 흘려 버리고,
울음으로써 내 마음의 아름다움은 촉촉히 적시고 싶습니다...
울음으로써 내 마음의 사랑이 상대를 촉촉히 적시길 바랍니다...
울음으로써 행복해 지고 싶습니다...
-Happy ViruS-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창피함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이며, 삶의 가장 큰 용기는 긍정생각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매미가 매미다워져야 참매미가 된다.
“매미가 매미다워져야 참매미가 된다.”는 한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난다. “매미의 애벌레는 알에서 부화하여 스스로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7년을 살고, 매미가 되어서는 여름 한 철 살다가 죽습니다. 그 긴 기간 동안 매미의 애벌레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진정한 매미가 되기 위해 즉, 매미다워지기 위해 견디고 또 견딥니다. 그 7년, 조물주의 신비죠! 매미다워지라는!!!”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대다수 사람들의 다워짐이 매미와는 거꾸로일까? 왜 아이 때 가졌던 사람다움을 버리고 점점 커가면서 캄캄한 암흑 속으로 들어갈까?
이제는 거꾸로 살아야...
초등학교 1학년인 내 아들과 2학년인 내 딸처럼 어렸을 적에 난 참 바른 생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제일 바른 학생이었고, 중학교 때는 약간 바른 학생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는 약간 틀린 학생, 대학교 때는 많이 틀린 학생,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완전히 틀린 놈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도덕점수가 항상 100점이었을 정도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쉽게 하였었는데, 중고등학생으로 성장하면서부터 도덕점수를 70점 맞을 정도로 헷갈려 했다. 대학생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어땠을까?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를 분간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옳고 그름도 모르면서 옳은 것은 이런 거야! 라며, 소리 높여 주장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솔직하지도 못했고, 또 비겁했다. 왜 그럴까? 나만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지나 온 내 삶의 많은 잘못이 언제부터인가 흐르는 내 눈물을 막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제는 거꾸로 살아야겠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닮아가야겠다. 바른 생활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다워져야겠다. 솔직하고 정직하며 꾸밈없는 우리 아이들을 본 받아야겠다.
솔직한 드러내기
사람들은 ‘드러내기’란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사용할까? 아마도 흔히 ‘드러내기’는 “저의를 드러내는, 또 본색을 드러내는”등의 나쁜 마음에 빗대어 “이제야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구만!”, “너의 본심이 언젠가는 드러날 꺼야!”등과 같이 부정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아마도 드러낸다는 의미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 앞에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알리게 되는 경우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드러내기’ 앞에 ‘솔직하게’라는 말을 붙여보면 어떻게 될 까? 즉, 남에 의해 드러남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드러내는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한다면 어떤가? 참 멋져 보이는 느낌이다. 사실 사람들은 드러내기를 꺼리고 또 꺼린다. 나서기가 부끄러워 꺼리고, 망신에 대한 창피를 떠올려서 꺼리며, 왕 따가 두려워서 꺼린다. 그래서 ‘드러내기’를 긍정보다 부정에 많이들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드러내기에 대해 꺼려지는 것을 이기고 “솔직하게 드러내기”란 단어를 실천한다면, 그 진실함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고, 그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 마음에 소리 없이 스며들 것이란 생각이다.
“진실한 사과는 우리를 춤추게 한다.”라는 켄 블랜차드의 책에 소개된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통령의 부끄러움 드러내기라고 할까? 대통령의 사과라고 할까! 아무튼 짧게 소개해 보면, 전쟁 중 부하(스콧대령)의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장례휴가 요청-직속상관에게 휴가요청을 거절 당하자 링컨대통령이라면 요청을 받아주리라는 생각으로 찾아감-에 대해 “잠시만이라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나? 왜 이 따위 문제로 여기까지 오나? 지금 내가 할 일 없이 노는 사람처럼 보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네.”라며 묵살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밤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뉘우친 링컨은 비록 자신이 국가원수인 대통령이었지만, 직접 이른 새벽 부하의 숙소에 달려가 스콧 대령의 손을 꽉 잡으면서 “스콧 대령, 어제 저녁 나는 사람도 아니었네. 정말 할 말이 없네. 어제는 너무 심신이 지쳐 있었네. 그렇다고 해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아내를 잃어 실의에 빠진 사람을 그렇게 험하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밤새 후회하면서 뒤척이다가 용서를 청하러 왔네.”라며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자신이 링컨이라 생각해보자. 과연 링컨처럼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내기”는 많은 사람들의 본 보기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라는 생각이다.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직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대충 묻어 사는 무지이며, 삶의 가장 큰 용기는 거짓의 탈을 벗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속담을 흔히 잘못 알고, 또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솔직한 주장에 대해 “참 피곤한 삶을 살겠네! 한참 다듬어져야 되겠네!”라는 생각과 말의 사용! 과연 올바른 사용일까? 또, 어른들의 경우 어떤 입 바른 말에 대해 “야! 대충해! 너 혼자 잘났냐! 피곤하구만 피곤해! 모난 돌이 정 맞는대!” 라는 말의 사용! 과연 올바른 사용일까? 만약 그렇다면 바른 삶, 바른 생활이 모난 돌인가? 대 다수의 사람들과 반대로 사는 삶이면 그냥 모난 돌일까? 올바른 원칙을 행함이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다듬어져야 하는 모난 돌인가? 그럼 모난 돌이 바른 생활인가?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분명 모난 돌은 잘못된 행동과 잘못된 말이 모난 돌일 것이다. 그럼 왜 다수의 사람들이 모난 돌을 잘못 사용하는 걸까? 아마도 거의 대다수가 잘못되고 거짓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대다수가 그렇게 잘못된 거짓 생활을 하니, 잘못을 용인하고, 그러다 보니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올바른 정직을 피곤함으로 인식해 모난 돌로 착각하고 사용하는 것 같다. 또 그렇게 모난 돌을 잘못 비유하다 보니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러다 보니 본 심과 다르게 잘못에 대해서 “괜찮아! 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흔히 하는 것 같다. “야! 괜찮아! 그래도 돼!”라는 말이 너무도 무섭고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늘 “솔직한 삶을 살리라!”하며 다짐한다. “칭찬과 아부를 또 훈육과 비난”을, 그리고 정직과 거짓을 착각하고 사는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하고 다짐한다.
우리 삶의 진실은 몇 시그마일까?
혹시 1-β와 1-α가 무엇인지 아는가? 6시그마를 배웠다면 잘 알 것이다. 바로 통계의 추정과 검정에 나오는 검정력(Power), 즉 어떤 결정에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1-β라 하고, 1-α는 제시한 주장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정도, 즉 신뢰수준(Confidence Level)이라고 한다. 그러면 시그마 (σ)를 아는가? 시그마란 표준편차(평균으로부터 평균적으로 떨어져 있는 정도) 즉, 산포(흩어져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6시그마는? 6시그마는 백 만개의 어떤 물품 중에 단 세 개만 불량인 수준을 의미한다. 백 만개 중에 단 세 개 불량, 쉬울까? 어려울까?
그러면 우리 삶의 검정력(1-β)은 무엇일까? 아마도 칭찬과 아부, 훈육과 비난, 정직과 거짓 등을 구별하는 힘(Power), 즉 분별력이라 할 것이다. 또 우리 삶의 신뢰수준(1-α)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정직한 삶의 노력과 부끄럽더라도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보일 때 신뢰수준(1-α)이 커지리란 생각이다. 그런 1-β와 1-α를 키우고 높임으로써 칭찬과 아부, 훈육과 비난, 정직과 거짓 등을 헷갈려 하는 정도인 산포(σ)를 아주 작게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용기 또는 정직이란 시그마수준이 백만 개 중에 999,997개가 정직(양품) 이고 단 세 개 정도만이 거짓(불량)인 수준, 즉 6시그마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이르기를 “감춘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라고 하셨다. 또 네덜란드 격언에는 “거짓이 아무리 빠르게 달음박질해도 결국 진실이 거짓을 앞지를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골방에서 속삭인 자신의 잘못을 지붕 위에서 선포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용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갖기를 소망한다.
진정한 용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또 삶에 있어 가장 큰 용기는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삶에 있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창피함과 부끄러움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이 중요한 한가지일 것이며, 정직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대충 묻어 사는 무지가 그 두 번째 일 것이다. 반대로 삶의 가장 큰 용기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첫 번째일 것이고, 자신의 잘못과 거짓의 탈을 벗고 올바르고 정직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그 두 번째일 것이다. 당신 삶의 진정한 용기는 과연 몇 시그마인가? 몇 시그마 수준의 드러냄과 정직함을 갖고 있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1-β와 1-α를 키우고 키워서 6시그마 수준의 솔직하고 정직한 그런 용기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